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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rly Church (초대교회)

 

성령의 도움으로 초대 기독교와 성경에서 시작된 진리, 교리, 경고 및 비전을 다시 찾는 것이  나의 사명입니다. 저는 초대 교회의 진리의 핵심을 이 마지막 세대에 있는 주님의 교회를 돕기 위한 지침, 매뉴얼 또는 전례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이 작은 시작이 사랑과 거룩함과 권능의 진정한 연합을 위한 집결 점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는 그의 나라가 성숙 해지는 것을 보기 위해 사랑과 개방성, 성경적 연합과 권능으로 모여야 합니다 (요 17 장).

신약 성경이 완전하고 직접적인 세부 전례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우리가 함께 할 때, 지상에서 천국으로 가는 "성스러운" 사다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건설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성령께서 초대 교회에서 상세한 신약성경(메뉴얼)을 제정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함께 있을 때, 우리의 방식대로 되지 않고, 그의 필요했던 존재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릅니다. 신약의 글과 편지는 영적이고 기본적인 전례의 정경과 예배의 모범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 비전 및 경고로의 복귀를 자극하는 것이 저의 희망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신약성서의 사도적 교리를 주셨는데, 그 교리는 사람-일 또는 육체-생명을 구축하는 교리입니다. 각 세대는 모든 기본적인 전례의 세부 사항을 세밀하게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님은 성서에 근거한 새로운 이해와 계시를 각 세대에 풀어줄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세대마다 의사소통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각 펠로우쉽의 영적 성숙도에 더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전례에서 약간의 조정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이 다스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중심이 된다면 더 많은 젊은이들이 성령의 존재를 즐기러 교회에 올 것입니다. 우리가 속아서 예수님을 사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대부분, 그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사랑과 거룩함과 그에 따른 표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역하시는 것이 분명하지 않는 한, 행동하는 하나님의 삼위 일체의 순수한 표징입니다. 교회는 사람들로 가득한 건물 일뿐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가 예수님을 볼 수 있을 때 그것이 참으로 교회 인 것입니다. 영광의 예수님,  진리와 권능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돈, 회원 프로그램, 건물 유지 관리 또는 오락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그분의 교회의 초점입니다. 성령은 아담의 반역에서 창조주의 완전한 교제 안으로 돌아 가고자 하는 사람들인 “부름 받은 자”인 주님의 교회에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신약 성경은 육체의 어떤 일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권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나의 영에 의한 것이다. (스 4 : 6). 어떤 효과적인 사역의 모든 면은 전적으로 성령의 지시에 따라야 합니다.  사역은 성령의 인도와 기름 부음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데 있어 성령의 필수적 존재와 경험 없이 우리가 할 수 있고, 수행하며, 훌륭해 보이고 종교적인 또한 우상숭배의 관습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오늘날까지도 선지자와 사도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은 “매우 종교적인”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은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골 2 : 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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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아담의 반역에서 창조주의 완전한 교제 안으로 돌아 가고자 하는 사람들인 “부름 받은 자”인 주님의 교회에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신약 성경은 육체의 어떤 일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권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나의 영에 의한 것이다. (스 4 : 6).

어떤 효과적인 사역의 모든 면은 전적으로 성령의 지시에 따라야 합니다.  사역은 성령의 인도와 기름 부음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데 있어 성령의 필수적 존재와 경험 없이 우리가 할 수 있고, 수행하며, 훌륭해 보이고 종교적인 또한 우상숭배의 관습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오늘날까지도 선지자와 사도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은 “매우 종교적인”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은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골 2 : 8-23).

Basics

우리 교회 성도들 중 다수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 영원한 언약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맺지도 못했습니다. 이것은 신앙에 대한 효과적인 가르침이 부족하기 때문이거나, 어쩌면 명확한 예가 부족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참된 회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에 있는 주, 왕, 주인이 되도록 초대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의 모든 존재가 그분의 모든 존재와 교환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자기 중심적 생활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로의 주요 변화). 회심은 단순히 정신적 이해의 변화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주와 왕이 되셔야 합니다. 정말로 왕이 되셔야 합니다. 회심은 새로운 종교나 교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창조주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로의 전환입니다.

 

저는 종종 질문자 또는 찾는 자들에게 "당신이 죽으면 영혼은 어디로 갈 것인가?"라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진정한 신자만이 응답할 수 있습니다. 즉, 다음과 같습니다.

1)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 또는

2) 예수님은 나를 위해 죽으셨고 나의 죄는 용서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내 삶의 주인 이십니다. 나는 천국에 있을 것입니다. 또는

3)“내가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으니 구원 받았습니다”(롬 10 : 9-10). 나의 생명은 어린 양의 피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4) 나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세주로 믿는 믿음으로 위로부터 태어나고 예수 그리스를 구원자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내 삶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요한, 2 장과 3 장).

그 혼란의 일부는 교회가 "침례"와 같은 종교적 단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영구히 발생합니다. 초기교회에서 물세례는 영적 죽음, 매장, 부활과 같은 하나님의 새 언약으로 가는 성도 세계로부터 분리되는 징표, 도장 또는 인증이였다. 세례는 할례와 유사하며, 옛 언약과 같이 신에게 분리를 나타냅니다(골 2:11-23).  “침례”라는 단어는 직물에 염색하는 것과 같이 침수, 즉 담금질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입니다. 신약의 저자들은 그 단어를 단지 물과 동일시 한 적이 없습니다 (히 6 : 2, 눅 3:16). 구절의 문맥은 무엇을 누구에 의해 무엇에 배치 할지를 결정했습니다.

 

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누군가가 무언가를 가져다가 다른 곳에 두는 것입니다. 1611 명의 킹 제임스 영어 번역자들이 영어 단어“immerse”(천에 염료로 넣을 것)를 사용하는 것을 무시한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아마도 그날의 전통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성경을 번역 할 때 침례와 관련된 유일한 매개체로 물을 고려했을 수도 있습니다.

O.T.에서와 같이 성경에서 "침례"또는 "침수"라는 단어의 다른 가능한 사용이 있습니다.

1) 30세에 나사렛인의 서약을 발표 한 것과 같습니다.

2) 또는 이방인 개종자들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데 사용됩니다. 또는 신약에서 : 1) 그리스도의 몸에 신자를 배치; 2) 물로 개종 사역자에 의한 배치;

4) 사역의 능력을 위해 필요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신자를 성령 안으로 배치; 고통의 세례; 불의 세례. 나는 일곱 개를 찾았고 더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히 6 : 2).

그리스어 "비숍" (overseer)은 1) 지방 사역의 목사, 2) 사도, 목회자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신약성서에서 발견되는 단어의 완전한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에서 보듯이 사랑과 거룩함, 힘의 진정한 균형을 제공하는 것이 지역 친목회, 공동체 및/또는 교회의 소명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복음주의적, 전례적 그리고 은사적 이라고 부릅니다.

이 세 줄기는 하나님의 전능의 강 생명의 강으로 합쳐져야 합니다. 우리는 진정한 성경적 통합을 위해 모든 비성경적 전통과 모든 비성서적 전통과 교단을 과감하게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 사이에서 드러난 우리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면 교단의 울타리가 무너져야 합니다. (더 자세한 정보는 '하나님과 권위'라는 장 아래 이 주제에 대해 알 수 있음). 만약 우리가 선택해서 이것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박해 때문에 그것을 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박해는 이미 시작됐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강력한 반대 없이는 성경책도 학교에 가져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국가 정부와 대법원에 의한 우리의 국가적 죄악과 자존심, 그리고 그의 나라에 대한 반역 때문에 하나님께서 더 이상 우리 나라에 보호를 주실 수 없게 되어서 우리의 뉴욕 무역 센터가 폭파되었습니다. 다음 장에서 "부당성의 비밀"을 봅니다. 우리는 지금 좋든 싫든 영적 전쟁에 있습니다. 결론은요?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쓴 것처럼 옳고 거룩한 것에 대한 창조주의 정의에 복종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요?

 

우리가 주님의 은총을 계속 떠나면, 우리는 주님의 은총을 잃게 될 것이고,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실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안에서"라는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향한 미국의 국가적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방식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방식대로가 아니라 죄악의 법적 지원으로 미국은 이제 심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의 사랑으로 그는 우리를 구했습니다. 그분의 거룩함 안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 위해 이 세가지 큰 믿음의 흐름에서 나오는 훌륭하고 성경적으로 건전한 교리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겸손함으로, 각각은 다른 두 사람에게서 배울 것이 많습니다.

 

일반적인 교회 예배를 벗어나 초대 교회와 마찬가지로 토요일 저녁 친목회라는 맥락에서 가장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예배는 저녁의 긴 시간 때문에 성령 안에서 더 많은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주임 장로나 목사는 성령 안에서나 성령과 함께 머물며 시간을 잘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목사는 수줍음을 타는 사람들을 격려할 자유가 있어야 하며, 때로는 그들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관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외향적인 사람들은 주님의 사역 안에서 그리스도의 육체가 필요로 하는 대신, 스스로 개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단계로 모여드는 시간을 보면 많은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다스리실 때 내가 경험한 바로는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다.

이 작은 책 KEYS에서 저는 단순하고 성경적인 형태의 예배를 나타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이것은“늦은 비”(요엘 2 : 23-32)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이전 비의 영광을 가져 오기 위해 초대 교회로 돌아가는 시간과 공간의 산책이 될 것입니다. 필요한 변화는 쉽지 않을 것이며 실수 없는 노력도 아닐 것입니다. 우리 주님과 함께하는 것은 처음 세 사람이었습니다. 다음 열두명; 그 다음 칠십명; 그리고 교회가 시작되기 전에 120 명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오순절 날까지“다락방”에 머무르는 데 순종 한 겨우 백 이십 명의 제자들이 최종적으로 3 년 반 동안 사역하셨습니다 (우리가 열흘을 기다렸습니까?). 그러나 이 백 이십명의 제자들과 함께 성령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한 교회 건축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교회는 또한 지상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참고 :이 경우 "신자"가 아니라 "제자"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늦은 비'를 즐기는 것이 성령의 마음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그분이 하신 일을 할 것이며 (요한 복음 14:12) 더 큰 일을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교리를 보는 것을 배우는 연습을 중단하거나 과거의 종교적 전통을 보는 것을 중단합시다. 믿음이 있는 일을 하는 법을 배울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실천하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것을 치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예수께서 `너의 믿음대로 될어지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라는 단어는 양궁 대회에서 황소의 눈을 놓친다는 뜻의 오래된 영어 단어입니다.  . 우리는 사도 행전 2:38 전례의 영 안에서 걷는 법을 배우기 위해 우리 자신과 서로에 대한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핵심을 찌르는 법을 배울 때, 우리는 아마 모든 것에 몇 개의 화살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선물을 남기는 것은 더 큰 죄입니다. 주님은 그 선물을 사시는 데 그렇게 큰 대가를 치렀고, 열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치려고 연습하는 것을 통해 치는 것을 배울 것입니다. 과녁을 잡고 있는 나뭇가지를 겨누어 황소 눈의 중심을 치는 법을 결코 배울 수 없을 것입니다. 요한은 우리에게 그가 있는 그대로, 우리도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요일 4:17)에 살고 있습니다. 여기가 우리 목표의 중심이 아닌가요?

 

우리는 믿음 안에서 진정으로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아버지처럼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과 함께 물 위를 걷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까? 사도 요한이 우리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는 정말로 예수님처럼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까 (요일 3 : 3)? 아니면 단지 좋은 교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성령께서 교회에 나타나서 모든 사람을 구원 하시고 치유하신 것은 언제입니까 (행 5:16)?

아마도 결국 우리 교회의 약점은 기본적으로 종교적 교단의 분열의 문제 일 수 있습니다. “지도자들이 가는 곳에 양이 반드시 따라 올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교단의 종교적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단순히 기독교인이었을 때. 단순히“The Way”의 추종자였습니다. 그리고 장로들은 주어진 지역의 다른 모든 경건한 장로들과 진정한 연합을 이루는“ 장로”였습니다. 더 이상 질문을 받으면 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말합니다.

 

초대 교회,“가정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제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모임”은 시설이 아니라“교회”로 간주되었습니다. “가정 교회”개념은 신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행 2:46, 롬 16.5, 고전 16:19, 골 4:15, 몬 2 장). “가정 교회” 에 사용된 윗방 중 일부는 동양의 주택 설계로 매우 컸는데, 대부분의 집에 꼭대기 층은 가족 모임을 위한 하나의 큰 공간이 있습니다. 이 윗방에 접근하는 것은 보통 외부 계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침실은 보통이 가족실 아래에 있었고 마구간은 때때로 구조물의 흙 바닥에 있었습니다 (행 20 : 9). 오순절에“다락방”은 적어도 120 명의 제자들이 10 일간의 교제를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넓었습니다 (행 1 : 13-15}.

 

초대 교회의 경우 주의 첫날은 토요일 저녁(행 20:7)이라는 점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모임의 핵심은 빵을 나누는 주님의 기념비에 집중되었습니다. 주님의 만찬은 고전.11:18-34 성령의 능력 안에서 초대 교회에서 행해졌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처럼 설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한 초대 교회에 주어진 복음주의적, 전례적, 은사적 진리의 균형을 놓쳤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가지 매우 분리된 교파적 “지위” 또는 “줄기”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각 줄기는 건강한 교회를 위한 성령의 은사와 기름 부음의 일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 줄기들은 강력한 강이어야 하지만 이 세 개의 줄기는 수세기 동안 교회의“ 결빙된 선택”에 의해 지어진 제방과 수로에 의해 유지되어 나란히 흐르고 있습니다. 나의 좋은 친구 인 가이 펠츠 신부는 그의 교회가 수년에 걸쳐“물건”의 보존에 헌신하는 하나님의“ 결빙된 선택”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5 에이커의 매우 비싼 빚을 졌습니다.) 많은 큰 교회 싸움은 “물건” 을 놓고 시작됩니다. 돈에 대한 사랑은 모든 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딤전 6:10. 대부분의 하나님의 사역이 구걸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분의 자금을 좋은 청지기로서 성숙하게 처리하거나 그분이 우리에게 요청한 것을 수행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일요일 아침이 아닌 다른 시간에 모임을 열어 독립적인 '가정 교회' 사역을 회복하시기를 바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성령께서 교회 건물의 어떤 현재의 노력에 대하여 부정적이 되는 것에 대하여 매우 조심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반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입니다." (마:13:29; 눅 9:50)

 

“가정 교회”는 (행 2:38)에서 볼 수 있는 신약 전례의 역할 모델이 필요합니다. 주의 만찬이 모임의 초점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참된 모습을 누리는 데는 준비의 세 단계, 그 다음에는 성찬과 기도의 세 단계가 있습니다. 가정 교회는 성령을 통해 우리 주님의 신비로운 존재에 대한 기대치를 회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징조가 있는 '말씀'의 확인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정신으로 함께 모여야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요 17)

기도 중에 그의 메시지가 확인될 것입니다.  그 일은 성령에 의해 이루어 지거나 전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수백 년 동안 "교회"는 주님의 나라의 비전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의 나라에 대한 어떤 경험도 갖지 못한 채 사람들을 "지옥에서 구원받도록" 설득해 왔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5장 16절의 체험 수준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신약성서의 '믿음'과 '단결'이 필요합니다.

신약 성서에서“교회”를 장소로 언급하는 것은 언제나 누군가의 집에서 친목 모임 장소로 사용되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신약 성서의“가정 교회”에 대한 성구는 (행 2:46, 롬 16.5, 고전 16:19, 골 4:15, 몬 2 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건축 사업에 자금을 대는 것을 고려하는 단어나 선례가 없습니다. 초대 교회에는 출생부터 12 세 (여아), 13 세 (남아)까지 자녀를 가르칠 책임있는 '주일 학교'가 없었습니다. 

12살과 13살의 아이들은 성인으로 책임의 지위가 주어졌고 교회의 성인 펠로우쉽에 입학했습니다. 이것은 부모들이 자녀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성도로 키웠다는 것을 가정합니다.

 “가정 교회” 사역을 시작할 때, 그렇게 인도받은 사람들은 아마도 두 사람 사이에 7 단계의 교제를 사용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부부에게 매우 효과적이지만 부부에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 단계가 익숙해 지면 다른 사람들을 친교에 초대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임이나 교제는 교제중인 사람들의 수에 관계없이“가정 교회”로 간주됩니다. 주님은 두세 사람이 그분의 이름으로 모일 때 함께 모여 그 가운데 계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18:20).

건물과 숫자는 중요하지 않으며 십일조를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약에서 내려놓음이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이것이 물 위를 걷는 것처럼 보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거기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 배에서 나와 함께 물 위를 걸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런 종류의 권한 부여의 가능성에 대해 몇 가지만 볼 수 있습니다. “진리의 통합”,“교리의 분열”,“교파의 장벽”및“비성경적 전통”의 결여 때문입니다.

현재의 교회는 원래의 지침서를 많이 생략하고 스스로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새로운 전례는 모든 참가자들을 멋있게 보이게 하지만, 우리 주님의 왕국은 현실에서 거의 경험하지 못합니다.  요컨대 우리는 우리 나라와 세계의 죄와의 전쟁에서 지고 있고 심지어 국가로서도 지금 우리는 기독교 공화국으로서 우리 민족 정신의 파괴에 다수의 유권자가 매달릴 정도로 아슬아슬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1세기 초대 교회처럼 오늘날 우리가 그의 나라를 즐길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극복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릅니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마스터 빌더와 그의 사도들이 제시한 대로 계획을 그려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에 주어진 진리를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지만, 잘못된 예를 가지고 오랫동안 불신임 훈련을 해 왔습니다. 우리는 거의 1900년의 전통을 거쳐왔고, 이젠 목욕물에 있는 아이를 분리해야 할 때 합니다. 이것이 현재 영적인 현실이며 우리가 주님의 제자를 양육하는데 필요한 필수 사항입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신약 성경의 근본적이고 단순하며 복음주의적이며 예배 중심적이고 은사적인 기독교인이 되려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믿기 때문에 복음주의적입니다. 나는 또한 우리 주님과 사도들이 정한 거룩함의 구조와 떡을 떼어 나누는 것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에 전례적입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신약 성경의 근본적이고 단순하며 복음주의적이며 예배 중심적이고 은사적인 기독교인이 되려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믿기 때문에 복음주의적입니다. 나는 또한 우리 주님과 사도들이 정한 거룩함의 구조와 떡을 떼어 나누는 것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에 전례적입니다.

 

그리고 은사자로써 저는 성령께서 나타나셔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치유하고, 삶을 바꾸고,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서 사람들에게 기쁜 마음을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편견에 빠지지 않고 평범한 기독교인의 균형을 찾는 기쁨을 나누는 것을 진정으로 즐깁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예수님을 위한 영혼의 구원이 진짜 문제라고 말합니다. 전례로 베드로와12제자와 같은 거룩한 구조가 없다면 교회가 없다고 말합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성령이 나타나지 않으면 당신도 교회가 없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각각은 진실의 일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본인이 만든 작은 상자 에서 벗어나려고 이 교회 저 교회를 찾아 다니면서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 합니다. (요17)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음이 고려될 수 있습니다.

 

1. 주어진 지역의 장로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서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해 부르는 소명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각 장로는 사랑의 교리적인 차이를 치유하는 데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연합하여(요17) 성도의 완성을 위하여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나누라고 부르신 양들을 목회하러 가십시오. (4:11-12)

2. 장로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물적 자원을 모든 공동체 가족들에게 공통으로 만들어 물리적인 재산과 집회 장소를 이용하여 권능으로 주의 나라 복음을 전하고 그의 교회 건축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공동 사역을 지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3. 원로들은 목회 중인 지역 교회 가족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움직여야 합니다.

4. 장로들은 성도간의 “평화의 결속신앙”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교리에서 중요한 문제를 다룰 수 있도록 질서 목적으로 감리 (중재자) 장로를 선택해야 합니다. (요한 17, 엡 4 : 11-16).

하나님의 부르심은 영혼과 제자들과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재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사실 천년 왕국 그리스도의 지상 통치 이후, 그는 지구상의 모든 것을 화장하고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깨진 맥주병이나 콘크리트 조각 하나도 이전 물건에서 남지 않을 것입니다 (벧후 3 : 4-15). 그래서 고래 문제와 지구 보전 문제는 저에게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영혼을 만지라는 소명에서 벗어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지구가 필요로 하는 수리에 대해 걱정할 수도 있지만, 지구는 마지막 영혼이 구원받은 후 불타는 쓰레기로 끝날 것입니다.

 

오직 인류의 영혼만이 위대한 창조주의 궁극적인 관심사입니다. 영원한 영혼의 자유 의지 사랑 만이 대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새 영혼을 만드실 수 있고 시간의 차원에서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에 한 번, 자멸 된 영혼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자유 의지, 영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상황이 실제로 얼마나 심각한 지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젠가 큰 반역에 대한 심판을 맡으실 것이며 그것은 호소도 없고 탈출도없는 최후 일 것입니다. 그러면 시간은 영원히 끝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여러분은 정말로 채널을 맞추지 않는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기독교 독신자들은 사귀지 않아요. 형제자매가 되고, 즐겁고, 기도하고, 많은 친구들을 즐기세요. 연애는 약혼해서 결혼으로 가는 것과 같아요. 먼저 정신에 힘쓰고, 그 다음엔 혼을 약혼에 담으세요. 육체적인 것은 결혼생활에만 속합니다. 이것은 신의 원래 계획이자 좋은 계획이었습니다. 성령으로부터 허가를 받을 때까지 잠재적 파트너에게 영혼에 대한 이야기조차 하지 말고, 여러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때까지 기다리세요. 너무 쉽게 궤도를 벗어나면 난파되는 것은 너무나 쉽습니다. 뒷문이 없어요. 신은 디저트를 먼저 대접하지 않습니다. (결혼에 관한 장 참조)

두려움은 믿음이 거꾸로 가는 것입니다. 신은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 결코 두려움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두려움이 전혀 없습니다. 두려움과 증오는 어둠의 세계에 속한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하나님 나라를 함께 지탱합니다. 그것은 책에 쓰여 있습니다; 신의 믿음과 사랑은 끝에서 이깁니다. 사람들이 두려움으로 당신을 조종하지 못하게 하세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의 정신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 건전한 정신을 주십니다. (2 딤.1:7) 주님 안에서 당신의 마음을 따르세요. 만약 그것이 불법, 부도덕, 비윤리적, 성경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면, 혹은 예수님이 하지 않으실 것이라면, 여러분은 자유입니다. 진실은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려고 당신의 인생을 낭비하지 마세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개 예언자들에게 돌을 던집니다; 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알고 있을까요?

Giving

 

신약 성경의 가정 교회는 율법에 따라 십일조, 헌금 또는 선물을 하라고 압력을 가하지 않습니다. 만일 당신이 율법 아래 현재의 교회 제도에 의해 기부하도록 조종 되었다면 그것은 우리 주님의 왕국에 아무런 도움이 않을 것입니다.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 ”(잠 13:22)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10 %가 구약 성경 율법 하에서 최저치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신약 성도”로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삶의 문제에 관한 그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왕국의 더 높은 헌신 아래 있게 됩니다 (히 8:10). 그분은 우리의“새로운 본성”에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그분 앞에서 기뻐하시는 일을 알고 행하기를 원하도록 그분의 생각을 우리 마음에 두기를 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 (고후 9 : 7)

 

그러므로 누구도 당신을 구약의 율법 아래에 두지 마십시오. 율법의 오래된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따라 따로 세워졌는데, 그것은 효과가 없고, 효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을 뿐입니다. 율법은 아담의 자녀로서 우리를 지켜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선했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왔습니다. (히 8:7-13)

신약성서에서는 베푸는 것에 대한 가르침은 상호주의, 즉 "사람이 뿌리는 대로 거두리라"입니다.  당신의 삶과 주님의 나라에서 어떤 작물을 재배하든, 당신은 적절한 씨를 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눅 6:38; 요12:24; 롬 8 : 5-8; 고후 9 : 5-15). 작물이 사랑받아야 되면 사랑도 씨앗입니다. 작물을 보호받아야 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삶에 안전을 심어야 합니다. 농작물에 자금을 지원한다면 씨앗은 또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재정이나 도움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겸손하게 그분의 창조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분의 왕국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농부의 믿음으로 필요한 씨앗을 심어야 하지만, 씨앗을 자라게 하는 햇빛과 비, 좋은 땅은 위대한 창조주께서 제공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잡초를 심고 뽑을 수 있지만 그는 작물을 자라게 합니다. 따라서 그분의 왕국에서 성공과 성장의 주요 측면은 믿음, 심기 및 잡초 제거입니다. “잡초”는 교만, 불신, 두려움, 게으름,기도 부족의 죄입니다.

작물을 심는 방법에 대한 믿음과 성경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분의 의의 밭을 키울 농부들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청원은 우리 주님이 마태 복음 6 : 9에서 말씀하신 것처럼“하나님 아버지”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기도 중보를 위해 우리의 필요를 서로 공유 할 수 있지만 우리의 요청은 은밀하게 하나님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마 6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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